[심층] 하루 4시간 보던 HTS를 껐다 — AI에게 투자 ‘절차’를 맡기고 ‘판단’만 남기기까지
개발자용 검은 창을 투자 어시스턴트로 바꾸고, 투자 과정을 9개 단계로 쪼개 양식을 고정한 6개월의 기록
지난봄까지 제 하루에서 주식에 쓰는 시간은 서너 시간을 넘겼습니다. 지금은 30분 안팎입니다. 줄어든 것은 화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고, 늘어난 것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같은 항목을 빠짐없이 확인하는 횟수입니다. 이 글은 그 사이에 무엇을 만들었고 무엇이 안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열심히 보기는 했는데, 남는 게 없었다
개인 투자자의 하루는 대개 비슷합니다. 출근길에 경제 기사와 뉴스레터를 훑고, 업무 틈틈이 HTS를 열어 붉고 푸른 숫자를 확인합니다. 점심시간에는 관심 종목의 공시를 뒤지고, 퇴근 후에는 경제 유튜브를 두세 개 돌려 봅니다. 자기 전에 다시 미국 선물 지수를 확인하고 나서야 하루가 끝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하루 세 시간에서 다섯 시간, 어떤 날은 그 이상을 화면 앞에서 보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쏟아부은 시간이 결정의 품질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유는 지나고 나서야 보였습니다. 매번 보는 항목이 달랐습니다. 어떤 날은 수급을 꼼꼼히 보고 어떤 날은 건너뛰었습니다. 피곤한 날은 차트만 보고 넘어갔습니다. 봤다는 사실도 남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한 시간을 들여 기업의 재무제표를 뜯어봤는데, 두 달 뒤 주가가 흔들릴 때 그때 무엇을 보고 괜찮다고 판단했는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순서가 거꾸로였습니다. 사야 할 이유를 먼저 정하고 가격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가격을 먼저 보고 나서 사야 할 이유를 만들어 냈습니다.
거꾸로 된 순서가 가장 나빴습니다. 이미 오른 종목을 보고 나면 사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찾아집니다. 그렇게 산 종목이 빠지면 팔아야 할 이유도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찾아집니다. 열심히 공부한 개인 투자자가 결국 뇌동매매에 이르는 경로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보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정보를 보는 순서가 매번 달라서입니다.
채팅창에서 시작했지만, 채팅창에서는 끝나지 않았다
대화형 AI에 주식 이야기를 물어보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요즘 반도체 업황이 어떤가”, “이동평균선은 어떻게 보는 건가”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답이 꽤 쓸 만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한쪽으로 기운 이야기를 하면 반대편 논리를 꼬박꼬박 들이밀었습니다. 혼자 결론에 도달하던 습관에 제동이 걸리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질문이 길어졌습니다. 이 종목의 강점과 약점을 나눠 달라, 이 시나리오가 틀리려면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나, 같은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가 계속 걸렸습니다.
하나는 대화가 남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좋은 분석을 받아도 채팅창 스크롤을 올려야 찾을 수 있었고, 며칠 지나면 어느 대화에 있었는지도 헷갈렸습니다. 복사해서 메모장에 붙여 두면 이번에는 양식이 제각각이라 나중에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매번 처음부터 설명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어떤 종목을 들고 있는지, 손실을 얼마까지 견딜 생각인지, 어떤 기준으로 매수와 관망을 나누는지를 대화를 새로 열 때마다 다시 입력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번 조금씩 다른 기준으로 답이 나왔습니다.
뜻밖의 답은 개발자용 검은 창이었다
실마리는 프로그램 개발에 쓰는 CLI 도구에서 나왔습니다.
CLI는 커맨드 라인 인터페이스의 줄임말로, 검은 화면에 글자로 명령을 입력하는 방식입니다. 요즘은 여기에 AI가 붙어서, 개발자가 “이 파일에서 이 부분을 고쳐 줘”라고 말로 시키면 AI가 직접 파일을 열어 고치고 결과를 보여 줍니다. 본래 목적은 코딩입니다.
검은 창이 낯선 분께
맥이면 ‘터미널’, 윈도우면 ‘PowerShell’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설치돼 있는 기본 프로그램입니다. 따로 구할 것은 없습니다. 그 창을 열고 AI 도구를 실행하면 됩니다.
명령어를 외울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입력하는 것은 “투자 브리핑 해줘” 같은 평범한 한국어 문장입니다. 여섯 달 동안 제가 직접 짠 코드는 한 줄도 없습니다. 필요한 프로그램이 생기면 그것도 AI에게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버튼이 없다는 점이 불편해 보이지만, 그게 이 도구를 고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증권사 앱에서는 만든 사람이 넣어 둔 기능만 쓸 수 있습니다. 이 창에서는 제가 확인하고 싶은 것을 문장으로 적어 시키고, 그 문장을 파일로 저장해 두면 다음부터는 같은 순서가 그대로 반복됩니다.
여기서 하나만 짚어 두겠습니다. 웹 채팅창이든 휴대전화 앱이든 이런 개발자용 도구든 모두 같은 AI로 들어가는 서로 다른 문입니다. 문이 다르다고 머리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고, 손발이 달라집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코딩 기능이 아니라 그 옆에 붙은 세 가지 성질이었습니다.
첫째, 내 컴퓨터의 파일을 직접 읽고 쓴다는 점입니다. 채팅창 AI는 제 기록을 볼 수 없지만, 이쪽은 제가 쓴 메모를 읽고 새 메모를 만들어 정해진 폴더에 저장할 수 있습니다. 대화가 휘발되지 않고 파일로 쌓입니다.
둘째, 지시서를 미리 고정해 둘 수 있다는 점입니다. “너는 이런 역할이고, 이런 요청이 오면 이런 순서로 처리하고, 결과는 이 양식으로 써라”를 파일 하나에 적어 두면 대화를 새로 시작해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매번 설명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셋째, 바깥 도구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요즘 MCP라고 부르는 규격 덕분에 AI가 공시 자료나 시세, 일정 같은 외부 데이터에 직접 닿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앞서 다른 글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개발자들이 코드를 다루려고 만든 도구인데, 그 안을 들여다보니 지시서를 고정하고, 기록을 파일로 남기고, 외부 데이터를 끌어오는 장치였습니다. 다루는 대상이 코드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는 투자 기록을 다루기로 했습니다.
뜯어보면 부품은 두 개였다 — 지시서와 연결 규격
지금 돌아가는 것을 뜯어보면 부품이 두 개입니다. 이름은 낯설지만 하는 일은 단순합니다.
하나, 지시서(스킬)
요즘 이런 도구들은 미리 적어 둔 역할 설명서를 ‘스킬’이라고 부릅니다. 파일 하나에 “너는 어떤 역할이고, 이런 요청이 오면 어떤 순서로 처리하고, 결과는 어떤 양식으로 어느 폴더에 저장해라”를 적어 두는 것입니다.
제 것은 A4로 예닐곱 장쯤 됩니다. 앞부분에는 어떤 말을 들으면 어느 단계를 실행할지가 적혀 있습니다. “투자 브리핑 해줘”는 아침 브리핑, “지금 사도 되나”는 매수 전 점검표, 이런 식입니다. 뒷부분에는 각 단계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결과물을 어느 폴더에 어떤 이름으로 저장할지, 주가를 인용할 때는 반드시 기준 시점을 같이 적을 것, 그리고 매수나 매도를 직접 지시하지 말 것 같은 것들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대화가 아니라 파일이라는 것입니다. 채팅창에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창을 닫으면 사라지지만, 파일에 적어 두면 대화를 새로 열어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제와 오늘의 기준이 같아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고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가설 검증 절차를 넣을 때도 새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지시서에 몇 줄을 추가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버전 번호를 붙여 두고, 고칠 때마다 무엇을 왜 바꿨는지 함께 적어 둡니다.
둘, 연결 규격(MCP)
다른 하나는 AI와 바깥 데이터 사이를 잇는 배관입니다. MCP라고 부르는 규격인데, 쉽게 말해 AI가 쓸 수 있는 콘센트 규격을 통일해 놓은 것입니다.
예전에는 공시 사이트를 열고 표를 복사해 붙여 넣었습니다. 지금은 필요한 자료를 AI가 직접 가져옵니다. 제가 꽂아 둔 것은 세 가지입니다. 기업의 재무제표와 공시를 조회하는 통로, 다음 주 주요 경제 일정을 제 구글 캘린더에 등록하는 통로, 그리고 가끔 세법이나 금융 규정을 확인할 때 쓰는 법령 조회 통로입니다. 시세는 증권사나 거래소가 열어 둔 자료를 직접 받아 오는 짧은 프로그램을 AI에게 만들게 해서 씁니다.
MCP 자체가 무엇인지는 전에 한 번 따로 다룬 적이 있어 여기서는 줄입니다.
둘의 역할이 다릅니다
한 문장으로 나누면 이렇습니다. 지시서는 “무엇을 어떤 순서로 할지”를 정하고, MCP는 “그 자료를 어디서 가져올지”를 정합니다. 하나는 절차이고 하나는 배관입니다.
개인이 이런 것을 만들 때 공들일 곳은 앞쪽입니다. 연결 규격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가져다 꽂으면 되지만, 지시서에는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보는지가 들어가야 해서 남이 대신 써 줄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여섯 달 동안 고쳐 온 것도 대부분 이 지시서였습니다.
두 번째 깨달음: 좋은 답보다 ‘같은 양식의 답’
도구를 바꾸자 곧바로 다음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답의 품질은 좋아졌는데 형태가 매번 달랐습니다. 어제는 재무 이야기를 길게 쓰고 오늘은 수급 이야기를 길게 쓰는 식이었습니다. 한 달 치를 모아 놓고 보니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순서를 뒤집었습니다. AI에게 “잘 분석해 줘”라고 하는 대신, 빈칸이 뚫린 양식을 먼저 만들고 그 칸을 채우게 했습니다.
이 단계에서 투자 과정을 통째로 쪼갰습니다. 아침에 시장 전체를 보는 일, 특정 산업을 파고드는 일, 개별 기업을 뜯어보는 일, 매수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확인하는 일, 매매한 뒤 기록하는 일, 한 달 치를 모아 복기하는 일은 목적이 다 다릅니다. 목적이 다르면 확인할 항목도 다르고, 남겨야 할 기록도 다릅니다.
지금은 아홉 개 단계로 나뉘어 있습니다. 각 단계에는 부르는 말과 채워야 할 양식이 하나씩 붙어 있습니다.
| 단계 | 언제 쓰나 | 부르는 말 | 남는 기록 |
|---|---|---|---|
| 일간 브리핑 | 장 시작 전, 하루 한 번 | “투자 브리핑 해줘” | 거시·수급·보유 종목 점검 한 장 |
| 장중 시장점검 | 장중 변동이 클 때 | “시장 점검해줘” | 시각별 스냅샷 |
| 매크로·섹터 리서치 | 특정 이슈를 파고들 때 | “이 테마 리서치해줘” | 밸류체인과 수혜·피해 정리 |
| 신규 종목 발굴 | 후보군을 넓힐 때 | “지금 흐름에 맞는 종목 찾아줘” | 후보 3~5개와 선정 이유 |
| 종목 심층 분석 | 진지하게 검토할 때 | “종목분석 해줘” | 강점·약점·목표가·손절가 |
| 매매 타이밍 점검 | 주문 직전 | “지금 사도 되나” | 5단계 점검표와 판정 |
| 매매 기록 | 체결 직후 | “오늘 매수했어” | 매매일지, 매도 시 결과분석 추가 |
| 정기 리뷰 | 월말·분기말 | “이번 달 리뷰해줘” | 전략별 성과와 다음 달 계획 |
| 보유 종목 일제 점검 | 주 1회가량 | “보유 종목 점검해줘” | 전 종목 한 장 요약 |

여기에 정식 절차로 들어가기 전에 쓰는 가벼운 단계가 하나 더 있습니다. 장을 보다가, 뉴스를 보다가 “이 회사 괜찮은데” 싶을 때 쓰는 3단계 필터입니다. 이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상장돼 있고 매출에서 의미 있는 비중인가, 실제로 실적이 따라오고 수급이 붙는가, 이미 유행이 끝난 뒤는 아닌가. 이 세 가지를 통과하지 못하면 거기서 끝냅니다. 통과하면 관심 종목에 올리고, 확신이 서면 심층 분석으로 넘깁니다. 펀드매니저 피터 린치가 생활 속에서 종목을 찾으라고 했던 방식을 세 줄로 줄인 것입니다.
이 단계 구분에서 중요한 것은 개수가 아닙니다. 각 단계의 양식이 고정돼 있다는 점입니다. 종목 분석 양식에는 강점을 적는 칸 옆에 반드시 약점을 적는 칸이 있습니다. 타이밍 점검 양식에는 손절가를 적지 않으면 판정이 완료되지 않습니다. 제가 피곤하든 급하든 그 칸은 비워 둘 수 없습니다.
graph TD
A["생활 속 아이디어<br/>(3단계 필터)"] --> B["섹터·테마 리서치"]
B --> C["종목 심층 분석<br/>(강점·약점·목표가·손절가)"]
C --> D["매매 타이밍 점검<br/>(5단계 · 손절가 필수)"]
D --> E["매매 기록"]
E --> F["월간·분기 리뷰"]
F -. "다음 사이클에 반영" .-> B하루가 어떻게 바뀌었나
가장 크게 바뀐 것은 HTS를 켜는 시간입니다. 이제 거의 켜지 않습니다. 주문을 낼 때만 휴대전화의 MTS를 잠깐 씁니다.
| 시간대 | 예전 | 지금 |
|---|---|---|
| 아침 | 지수·환율·해외 뉴스 확인 30~40분 | 브리핑 한 장 읽기 5~10분 |
| 장중 | 수시로 HTS 확인, 누적 1~2시간 | 알림이 오면 확인, 대개 0분 |
| 저녁 | 경제 유튜브·기사 2~3시간, 자기 전 선물 확인 | 필요할 때만 리서치 지시 후 결과 확인, 주 2~3회 20분 안팎 |
| 매매 직전 | 차트 보고 즉흥 결정 | 5단계 점검표 통과 여부 확인 10분 |
| 주말 | 거의 안 함 | 한 주 매매 복기와 다음 주 일정 확인 30분 |
없어진 항목도 있습니다. 자기 전 선물 확인은 아침 브리핑의 한 줄로 옮겼습니다. 밤에 본 숫자는 미국 장이 대여섯 시간 더 돌아가는 동안 뒤집히고, 무엇보다 그 시간에는 주문을 낼 수 없습니다. 확인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시각에 확인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같은 숫자를 장 열리기 전에 보면 그날의 판단에 쓰이지만, 자기 전에 보면 잠자리만 뒤척이게 만듭니다.
합쳐서 하루 3~5시간이 30분 안팎으로 줄었습니다. 다만 이 숫자만 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줄어든 것은 화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지, 투자에 쓰는 머리는 오히려 늘었습니다. 예전에는 숫자를 모으느라 지쳐서 정작 판단할 때는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모으는 일을 넘기고 판단만 합니다.
두 번째 변화는 빠뜨림이 줄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바쁘면 건너뜁니다. 양식은 건너뛰지 않습니다. 매수 직전 점검표에서 손절가 칸을 비워 두면 판정이 나오지 않으니, 최소한 “얼마에서 손절할 것인가”를 정하지 않은 채로 주문을 내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세 번째는 기록이 쌓인다는 점입니다. 각 분석 노트에는 작성 날짜가 파일 이름에 박힙니다. 석 달 전에 이 종목을 어떻게 봤는지, 그때 목표가를 얼마로 잡았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주가가 흔들릴 때 그 기록을 다시 읽는 것과, 기억에 의존해 지금의 기분으로 판단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기록을 두 종류로 나눈 것이 의외로 결정적이었다
기록은 옵시디언이라는 메모 도구에 쌓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모든 글이 제 컴퓨터에 평범한 텍스트 파일로 남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정 회사의 서비스가 문을 닫아도 파일은 그대로 남고, AI도 그 파일을 직접 열어 읽고 쓸 수 있습니다.
만들면서 가장 덕을 본 설계는 따로 있습니다. 기록을 두 종류로 갈라 놓은 것입니다.
하나는 종목별로 딱 한 장씩 두는 종목 카드입니다. 현재가, 등락률, 관심 종목인지 보유 종목인지, 지금 잡고 있는 목표가 같은 것이 들어갑니다. 계속 바뀌는 정보이므로 늘 최신 상태로 덮어씁니다.
다른 하나는 날짜가 박힌 분석 노트입니다. 8월 14일에 이 종목을 어떻게 봤는지가 담깁니다. 이 노트는 나중에 고치지 않습니다. 시세가 어떻게 변하든 그날의 판단을 그대로 둡니다.
처음에는 이 둘을 한 장에 몰아 썼습니다. 그랬더니 시세를 갱신할 때마다 예전에 적어 둔 판단이 조금씩 지워졌습니다. 두 달쯤 지나 “내가 이걸 왜 샀더라”를 되짚으려 했을 때 남아 있는 것은 최신 시세뿐이었습니다. 과거의 나를 복원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종목 카드를 열면 현재 상태가 보이고, 그 아래 붙은 분석 노트 목록을 위에서 아래로 훑으면 제 생각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가 순서대로 드러납니다. 6월에는 낙관했다가 7월에 조심스러워졌고 8월에 다시 늘렸다면, 그 변화에 이유가 붙어 있는지 없는지가 한눈에 보입니다. 이유 없이 마음만 바뀐 구간은 대개 손실이 난 구간과 겹칩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걸 AI에게 뺏기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여름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한 가지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AI가 종목 분석을 너무 잘해 준다는 점이었습니다. 강점과 약점을 정리하고, 경쟁사와 비교하고, 목표가까지 뽑아 줍니다. 읽어 보면 그럴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걸 읽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곧바로 타이밍 점검으로 넘어갔습니다.
무엇이 빠졌는지 한동안 몰랐습니다. 빠진 것은 제 문장이었습니다.
“나는 이 회사가 A 때문에 B가 일어나 C로 재평가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한 문장을 제 손으로 쓴 적이 없었습니다. AI가 써 준 논리를 읽고 동의했을 뿐입니다. 남이 써 준 논리는 주가가 20% 빠질 때 버티게 해 주지 못합니다. 그건 제 확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순서가 다시 거꾸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분석을 읽고 곧바로 차트를 보면, 결국 차트에 맞춰 논리를 고르게 됩니다. 도구를 바꾸기 전에 저지르던 실수를 도구만 바꾼 채 되풀이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이달에 절차를 하나 고쳤습니다. 새 단계를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기존 종목 분석 단계를 부르는 방식만 바꿨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불렀습니다.
“삼○전자 종목분석 해줘.”
지금은 이렇게 부릅니다.
“삼○전자 종목분석 해줘. 내 가설은 「A 때문에 B가 일어나 C로 재평가된다」야. 내 문장을 그대로 넣고, 그 가설을 정면으로 반박해 줘. 그리고 내가 이 가설을 폐기해야 할 조건을 가격이 아니라 사실 기준으로 제시해 줘.”
한 줄 차이지만 결과물은 꽤 다릅니다. 분석 노트의 투자 논리 칸에는 제가 쓴 문장이 고쳐지지 않은 채 그대로 들어갑니다. 그 아래 반론 칸에는 AI가 그 문장을 겨냥해 쓴 반박이 들어갑니다. 마지막 결론 칸에는 그 반박을 읽고 제가 제 가설을 채택할지, 조건부로 받아들일지, 기각할지를 적습니다.
마지막 항목이 특히 쓸모가 있습니다. 무효화 조건입니다. “주가가 얼마 아래로 빠지면”이 아니라 “3분기 안에 수주 공시가 없으면”, “경쟁사가 같은 규격 제품을 출시하면” 같은 사실 기준으로 적습니다. 가격은 매일 흔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격을 기준으로 삼으면 흔들릴 때마다 판단이 바뀌지만, 사실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 일이 일어났는지 아닌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조건의 후보는 AI가 댑니다. 다만 그중 무엇을 제 무효화 조건으로 삼을지는 제가 고르고, 고른 것만 노트에 남습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 붙였습니다. 매도한 뒤 쓰는 결과분석 기록에 가설이 맞았는지를 따로 적는 칸을 만들었습니다. 수익이 났는지와는 별개입니다. 가설이 틀렸는데 돈을 번 경우와 가설이 맞았는데 돈을 잃은 경우는 전혀 다른 사건인데, 수익률만 기록하면 둘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월말 리뷰에서 이 항목을 모으면 “이번 달은 벌었지만 내 판단이 맞아서 번 건 절반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유쾌하지는 않지만 필요한 숫자입니다.
되지 않는 것들
여기까지 읽으면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일 텐데, 안 되는 것도 분명합니다.
AI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반박하지만, “그래서 지금 사야 하나”에는 답하지 못합니다. 답을 내놓더라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아예 지시서에 매수·매도를 직접 지시하지 말라고 못 박아 두었습니다. 사고파는 것은 제 몫이고 손실도 제 몫이기 때문입니다.
숫자를 틀립니다. 종종 시세나 재무 수치를 잘못 가져옵니다. 그래서 매매에 직접 쓰는 숫자는 지금도 원본을 다시 확인합니다. 자동화가 덜어 주는 것은 수고이지 책임이 아닙니다.
공짜가 아닙니다. 매일 돌리면 사용료가 한 달에 몇 만 원 나갑니다. 매매 규모가 작다면 이 비용이 수익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치 않습니다.
만드는 데 시간이 듭니다. 지시서와 양식을 다듬는 데 여러 달이 걸렸고 지금도 손보고 있습니다. 이번 달만 해도 앞서 말한 가설 검증 절차를 넣느라 지시서와 양식 예닐곱 곳을 고쳤습니다. 한 번 만들어 두면 끝나는 물건이 아니라, 쓰면서 계속 다듬는 물건입니다.
남이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물건도 아닙니다. 양식에 적힌 항목은 제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저는 손실을 어디까지 견딜지를 먼저 정하고 들어가는 편이라 손절가 칸이 앞쪽에 있지만, 배당을 보고 길게 들고 가는 분이라면 그 칸보다 배당 이력과 재무 안정성 칸이 앞에 와야 합니다. 남의 양식을 그대로 옮겨 오면 정작 자기가 확인해야 할 항목이 빠진 채로 점검을 마치게 됩니다. 구조는 참고하되 항목은 직접 골라야 합니다.
그리고 수익률이 올랐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 글에서 수익률을 말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여섯 달은 어떤 방식이 옳았는지 판정하기에 너무 짧습니다.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 줄었고, 빠뜨리는 항목이 줄었고, 왜 샀는지를 기억할 수 있게 됐다는 것까지입니다.
시작한다면 이 순서로
비슷한 것을 만들어 보려는 분께 권하고 싶은 순서가 있습니다. 제가 거꾸로 갔다가 돌아온 길이기도 합니다.
첫째, 자동화보다 양식이 먼저입니다. 스크립트를 짜기 전에 종이에 적어 보십시오. 내가 종목을 살 때 확인하는 항목이 무엇인지, 그중 빠뜨리기 쉬운 것이 무엇인지. 그 목록이 곧 양식입니다. 양식 없이 자동화부터 하면 쓸모없는 자료만 빨리 쌓입니다.
둘째, 한 단계부터 시작하십시오. 저는 아침 브리핑 하나로 시작했습니다. 그 하나가 두 주쯤 안정적으로 돌아간 뒤에 다음 단계를 붙였습니다. 아홉 개를 한꺼번에 만들려고 했다면 중간에 그만뒀을 것입니다.
셋째, 가장 귀찮은 단계를 없애지 마십시오. 매수 전 점검표는 솔직히 귀찮습니다. 그런데 그 귀찮음이 이 시스템에서 가장 값나가는 부분입니다. 마찰을 없애면 다시 즉흥적으로 사게 됩니다.
넷째, 결론은 직접 쓰십시오. 자료 수집과 반론은 넘겨도 됩니다. “나는 이래서 산다”는 문장만은 직접 쓰는 편이 좋습니다. 그 문장이 없으면 주가가 빠질 때 붙들 것이 없습니다.
맺으며
여섯 달 전 제가 하던 일은 정보를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은 모여 있는 정보를 보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사이에 있었던 변화는 대단한 기술이 아닙니다. 개발자들이 쓰던 도구의 쓰임새를 조금 비틀었고, 투자 과정을 단계로 쪼갰고, 단계마다 빈칸이 뚫린 종이를 한 장씩 놓아둔 것이 전부입니다.
거창한 자동화를 상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침마다 하던 일을 한 번만 글로 적어 두고, 그 순서를 매번 똑같이 지키면 됩니다. 여섯 달을 돌아보면 AI가 대신해 준 것은 판단이 아니라 순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섯 달 전에 제게 모자랐던 것도, 판단력이 아니라 순서였습니다.
더 읽기
면책
이 글은 도구 사용 경험을 다루며, 특정 종목이나 금융상품의 매수·매도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절차나 수치는 필자 개인의 사례이며 수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소개 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